9.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강보
베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ㅡ한 강의 다른 책들보다 제목에서 슬픔과 아픔이 적을 것 같다는 어렴풋한 선입견으로 고른 책. 자신과 공유 된 흰 것들에 대한 에세이보다 짧은 느낌글이다.
흰 것은 슬픔을 담기도 하고 슬픔을 놓을 수도 있다. 어릴적에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모든 이들이 희끄무레한 베옷에 지푸라기로 엮은 허리띠를 묶고 모두가 곡을 하던 그날의 슬픔... 흰 만장 십수개가 파란하늘에 휘날렸다. 슬픔이 하늘로 날아가는 듯했다.
19.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베네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시간 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121.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기를? 스무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아기의 베네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들어간 뒤 나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딱딱하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명치를 누르며 숨을 들이 마셨다.
ㅡ탄생과 죽음이 흰색으로 선명하다. 우리민족의 색이며 흰색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빛으로도 연상된다. 한이다.
한 강의 <흰> 에도 탄생과 삶 죽음으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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