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37
의사가 말하기를 늙은 이들의 몸에는 보통 대 여섯가지의 만성질환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러 병증 사이에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여서 무슨 병인지 진단하게 어렵다고 했다...병증들이 섞여서 두루뭉수리가 되었다는 말이다....병 조차도 늙어야 제대로 깊어지는 것인가 싶었다.
의사가 또 말하기를 늙은이 병증은 자연적 노화현상과 구분 되지 않아서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늙음은 병듦을 포함하는 종합적 생명현상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38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고 혼자서 울수 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이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 없는데 크게 나오지도 않는 바람만 픽 나온다.
39
단어들도 멀어져 간다. 믿고 쓰던 단어에서 실체가 빠져나가서 단어들은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불려 간다. 단어의 껍데기들이 눈보라처럼 바람에 쓸려 가는 풍경은 뿌옇다. 부릴 수 있는 단어는 점점 적어져서 이제는 한줌 뿐인데,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ㅡ겪기도 하고 겪어야 할 앞날이 보이듯이 와 닿는다.
허송세월
43
나는 오후에 두어시간 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 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에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움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볓은 신생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에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햇볕을 쪼일 때 나는 햇볕을 만지고 마시고 햇볕을 내 몸을 부빈다 햇볕을 쪼일 때 내몸에 관능은 우주공간으로 확장 되어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발가숭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햇볓을 쪼일 때 나는 내 생명이 천왕성 명왕성 같은 먼 별들과도 존재를 마주 대하고 있음을 안다. 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사이의 직접성을 훼손하는 장애물은 없고 내 그림자가 그 직접성의 증거로 내 밑에 깔린다.
48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 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 ...또 하루가 노을속으로 사위어 간다.
ㅡ허송세월 한다고 할 수있을 노년속에서 더욱 더 깊이있게 보고 느끼고 만져지는 것, 알아차림들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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