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책을 하다가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우연히 한그루의 라일락 나무를 만났다. 적당한 세월은 담고 있어 보이지만 반듯하게 잘생긴 자태도 아니고 나무가 있을만한 자리라고 보기엔 어정쩡한 구석에서 외롭게 보였다. 그저 무심히 지나가다가 코끝에 향기가 스치면 라일락 꽃피는 사월이 와 있었다. 라일락 향기는 지나치는 나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마치 보랏빛 치마자락을 살랑이며 봄바람에 춤추는 소녀처럼. 슬며시 다가와 톡 쏘듯이 아찔한 향기로 영감을 불러 일으켜 주곤 하였으니까.
‘살금살금 조용히 꽃이 피어납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게. 하지만 눈 감아도 알아지는 라일락 향기. 첫사랑의 여운 달콤하게 퍼져 나갑니다.
라일락 꽃나무 아래 들숨 날숨으로 향기에 취해 봅니다. 님이 품고 있는 사랑 향기가 나. 은은하게~
이 거리에서 마음을 잡으시네요. 잠시 쉼 하라고.’
그 이후 나는 더욱더 라일락의 계절인 사월을 손꼽아 기다렸다. 꽃과 나는 하나가 된듯이 공감하며 위로가 되어져 갔다. 조건없이 향기를 내어주는 꽃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라일락 나무가 심겨져 있는 근처의 낡은 건물이 갑자기 공사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높은 빌딩이라도 세우려는 듯 현장은 어지럽혀져 있고 인부들이 왔다갔다 북새통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라일락 나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길을 지나칠 때마다 빌딩이 점차 높아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해 봄, 나의 염려증을 날려버릴듯이 라일락 꽃은 어느 해보다 더 만개하여 눈부시게 빛났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화사한 꽃향기에 잠시나마 걸음을 멈추고 황홀해 하였다.
그러나 그 꽃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 굳건하게 싸여져 있던 빌딩의 가림막이 벗겨지고 근사하게 차려 입은 듯 우뚝 선 오피스 빌딩의 등장과 함께 내 작은 희망은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거리정리라는 그럴싸한 핑게로 라일락 나무는 차가운 길 위에 처참히 널브러져 있었고, 그 자리엔 건물주의 취향에 맞춘 화려하지만 내겐 낯설고 차가운 나무들이 대신 서 있었다.
나는 허탈감에 깊이 빠져 들었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며 라일락꽃으로 채워지던 이 작은 길이 내겐 얼마나 소중한 기쁨이었는지. 멋드러진 나무들보다 한없이 초라할지 몰라도 마음껏 향기를 내뿜던 그 라일락이 훨씬 더 정겨웠으니까. 그렇게 라일락은 꽃말 그대로 내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텅빈 마음을 달래며 그 길을 지나 공원도서관에서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펼쳤다. 소설 속 주인공은 지극히 높은 정신적 경지에 오른 후에도 결국 세상속의 사랑과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마지막엔 죽음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 담담하고 아름다운 희생이 내 마음을 차분히 어루만졌다.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다보면 그 자리에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살아있기에 사랑할 수가 있구나!
‘향기로운 꽃을 피워 운치있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으니 네 생애에 완성을 이룬거지. 너를 만난 날들은 무척 행복했단다. 내 삶의 사월엔 언제나 너의 꽃이 피어나고, 너의 향기는 그리움으로 남아 내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꺼야.’
나는 이제는 없는 라일락에게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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