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이 밤새 아우성치고
비는 억수로 쏟어져 내렸다.
하나 지금 해가 눈부시게 조용히 솟고 있다.
새들 먼 수풀에서 우짖고
들비둘기는 제 고운 목소리를 곰곰이 생각한다.
까치가 짖어 대니 어치가 화답한다.
대기는 시원한 물소리로 가득 차 있다.
2.
태양을 그리는 모든 것이 바깥에 나와 있고
하늘은 아침의 탄생을 기뻐한다.
풀은 빗방울 머금고 빛난다.
토끼가 황야를 신이 나서 달리며
발길로 젖은 땅에서 물보라를 올린다.
물보라는 햇빛에 반짝이며
어디까지나 토끼를 따라 달려간다.
3.
그때 나는 황야의 나그네였다.
나는 기뻐서 달음질치는 토끼를 보았다.
나는 숲과 먼 물소리를 들었다.
아니 듣지 못했던가, 소년처럼 들떠서.
즐거운 계절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의 옛 기억은 송두리째 내게서 사라졌고
또 부질없고 우울한 세상사도 사라졌다
4.
그러나 더 이상 갈 수 없는
희열의 힘으로부터
우리의 희열이 높이 올랐던 만큼
우리의 의기가 깊이 소침해진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법
그날 아침이 내겐 바로 그러하였다.
공포와 공상이 마구 육박해 왔다.
흐릿한 슬픔 - 알지도 못하였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마구잡이 망상이.
5.
나는 하늘에서 지저귀는 종다리를 들었고
마구 장난치는 토끼를 생각하였다.
나도 똑같이 행복한 대지의 아이다.
이들 행복한 동물처럼 나는 지내고 있다.
세상에서 멀리, 모든 근심에서 멀리 떨어져 나는 걷는다.
그러나 내게 다른 날이 올지도 모른다 -
고독, 마음고생, 고난, 그리고 가난이.
6.
줄곧 나는 즐거운 생각으로 살아왔다.
사는 일이 여름의 기분이기나 하듯이,
인정 많고 상냥한 믿음 가진 사람에겐
필요한 것은 모두 구하지 않아도 찾아오기나 하듯이.
그러나 스스로 마음 쓰지 않는 사람을 타인이 그를 위해 짐 지어 주고, 씨 뿌려 주고
호응의 사랑을 보내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7.
나는 저 놀라운 소년 시인 채터턴,*
한창때 요절한 잠자 틈도 없었던 영혼을 생각한다.
산자락을 따라 쟁기질하며 영광과 환희 속에 걸어갔던 시인 번스**를 생각했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정신에 의해 신으로 숭상된다.
우리 시인들은 젊었을 적 기쁨으로 출발하지만
마지막엔 절망과 광기가 찾아든다.
< * 토머스 채터턴 (Thomas Chatterton, 1752-1770) 영국의 시인. 열다섯 살 때 자작 시집을 중세 시인 롤리의 작품이라 속여 발표해 유명해졌고, 사실이 탄로 나자 자살했다. ** 로버트 번스 (Rovert Burns, 1759-1796) 스코틀랜드 에리셔 출신의 시인. 농장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고 시를 썼다.>
8.
그런데 특별한 하늘의 은혜인지
하늘의 인도인지, 무슨 선물인지
내가 이런 당치 않은 생각과 다투고 있을 때 이 호젓한 장소에
하늘에 탁 트이게 노출된 연못가에서
나는 홀연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호호백발의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인 듯 싶었다.
9.
벌거숭이 산꼭대기에 크낙한 바위가 누워 있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 그곳에,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을 본 사람은 궁금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것이 감각을 가지고 있는 듯 여겨진다.
해바라기 하기 위해 기어 나와 바위 위나 모래 위에서 쉬고 있는 바다짐승처럼
10.
이 노인이 바로 그러했다.
하도 늙어 아주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삶의 긴 나그넷길에서 허리 구부러지고 발과 허리가 하나되었다.
오래전에 받은 고통의 슬픈 속박이 혹은 질병의 엄습이
사람으로서 견디어 내기 힘든 부담을 그의 육체에 부과한 듯이.
11.
노인은 깎아 다듬은 나무의 긴 잿빛 지팡이에
손발, 몸뚱이, 창백한 얼굴을 지탱했다.
그리고 내가 살며시 다가가니
황야 속의 늪가에 노인은 서 있었다.
소리 높이 부르는 바람 소리도 듣지 않고
움직일 때면 떼 지어 움직이는 구름처럼 꼼짝도 않고.
12.
마침내 노인은 몸을 일으켜
지팡이로 웅덩이의 물을 휘젓고
마치 책이라도 읽고 있듯이
흙탕물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낯모르는 이의 특권을 행사하여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 말하였다.
"좋은 날씨가 될 것 같군요."
13.
노인은 부드럽게 대답하였다.
깍듯한 말씨로 아주 천천히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할아버지한테는 아주 외진 곳인데요."
노인은 대답하기 전에, 조용한 놀라움이
아직도 생기 찬 검은 눈동자에서 번뜩였다.
14.
노인의 말은 허약한 가슴에서 기운 없이 나왔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가 엄숙한 순서로 이어졌다.
고매한 기품을 띠고 있었다
- 골라잡은 말과 절도 있는 어귀,
보통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당당한 말솜씨였다.
스코틀랜드의 엄숙한 주민들
신과 인간을 사랑하는 종교적인 인사들이 사용하는 말이었다.
15.
노인은 말했다. 늙고 가난하여
거머리를 잡으러 이 물가에 왔다고.
위험하고 따분한 일이었다!
노인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못에서 못으로, 늪에서 늪으로 그는 떠돌았다.
신의 도움으로, 혹은 선택이나 우연으로 잠잘 곳을 구하며
이렇듯 그는 정직한 생활을 꾸려 왔다.
16.
노인은 여전히 내 곁에 서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목소리는 겨우 들리는 시냇물 같아
이 말 저 말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은 내가 전에 꿈에서 만났던 사람 같았다.
혹은 적절한 권고로 내게 기운을 내게 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파견된 사람 같았다.
17.
그전의 생각이 되돌아왔다.
섬뜩한 공포,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
추위, 고통, 노동, 모든 육체의 병,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위대한 시인들.
- 곤혹스러워 위로받고 싶어서
나는 다시 열의 있게 물었다.
"어떻게 사시며 무슨 일을 하십니까?"
18.
노인은 미소 띤 채 그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거머리를 잡으며 거머리가 사는 웅덩이 물을
발 주위로 휘저으면서
멀리 또 널리 떠돌아다녔다고. "그전엔 거머리가 어디에나 있었지만
이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소.
그러나 여전히 어디고 찾아다닌다우."
19.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 호젓한 외진 장소, 그의 모습, 이야기, 모든 것이 나를 괴롭혔다.
홀로 말없이 떠돌면서
계속 따분한 황야를 걷고 있는 그를
내 마음의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노인은 잠시 그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20.
이내 그는 다른 얘기도 섞어서 말하였다.
그의 말은 쾌활하고 상냥하고 대체로 당당하였다.
얘기가 끝났을 때
그렇듯 노쇠한 노인에게 그처럼 강단 있는 정신이 있음을 보고
나는 자신을 비웃고 싶은 지경이었다.
"신이여"하고 나는 말했다.
"저를 도와 단단히 지탱해 주십시오.
나는 외진 황야의 거머리잡이를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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