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2025년3월 다네이 책읽기) 내 마음의 도덕경 .김권일
왜, 나는 책을 읽을까?
(4월 글쓰기-나는 왜 쓰는가?) (피정때- 나는 왜 쓰는가?를 생각한 시간이 있었다)
각자가 책읽는 여러 까닭중에 하나 ‘도를 아십니까?’ 깨달음의 길을 알아가기 위해서다. (성경도 마찬가지) ㅡ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깨달음은 내 몸에 일치가 되는 습관으로 변화가 없다면 머릿속에 가둔 지식일 뿐, 아는 척할 뿐이다.
도는 자연과 무위(공)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움...순리대로 가는 길과 목표없이 공한 상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하느님을 본다. 하느님의 깊은 침묵은?
다 주신 사랑이면서도 척척척...을 안하시는 겸손함인 걸까?) 닮아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건, 도에 따르면 지식으로의 길보다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변화를 일컬으니 ... 아는척, 배운척, 가진척...잘난체,....비울수록 도의 길이구나. 겸손이다.
그렇게 알아듣고 나자신을 본다. 지식에서 나와 지혜를 구하려는 나보기 명상, 묵상이다.
나 스스로 낮출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낮아지기. 나를 낮추는 방법들 찾기...척은 교만이다.
94.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곡물의 왕이 될 수 있다.
ㅡ나는 ...왕이 될 수 있다.를 너그러움이 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고, 지혜로울 수 있다. 라고 바꾸고 싶다.
94.
‘세상에 처함에 있어 감히 잘난 체하여 앞에 나서려 하지 않음’ 이란? 청정한 빈마음에서 나오는 탈자아 중심적 태도로 처신함을 말한다. 진정한 낮춤과 참된 하심은 청정한 빈마음이 구비된 가운데 모든 것을 섬김의 태도로 대할수 있을 때 가능하다. 청정한 빈마음이 바탕이 되어 진정으로 자신을 낮출때, 마치 모든 물줄기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다로 모여들듯이, 그러한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저절로 모여들고 그를 따르기 마련이다.
ㅡ섬김. 오늘 내가 들으려는 말씀이다. 가장 어렵지만 이또한 한발자국씩 아래로 내려가 보련다. 더더더 낮아지는 습관. 잘난체를 멈추어 자신을 낮출수록 바다가 된다. 너그러워진다는 것.
115.
물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기에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도덕경은 집착이 없는 청정한 빈 마음만이 가질수 있는 참된 겸손과 또 이것이 가져다 주는 커다란 효과를 말하고 있다.
117.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의 속성에 대한 찬미를 통해 <도덕경>은 자기를 중심으로 삼지않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삶의 태도만이,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다툼이 없고, 어느 것 하나라도 손상됨이 없는 세상을 일구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도교에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손상이 없는 상태를 ‘태평’ 이라 한다.
118.
*자기에게 집착이 없으면* 사물의 모습은 저절로 드러난다. 집착이 없는 자의 움직임은 마치 물과 같이 순리를 따르고 집착이 없는 자가 고요함에 처할 때는 마치 맑은 거울처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가 외물에 감응하는 것은 마치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메아리 같다. 그의 사람됨의 깊이는 아득하여 없는 듯하고 고요하고 맑은 듯하다. 집착함이 없이 빈 마음으로 사물과 동화하면 화합을 이룰수 있지만 사물을 얻으려고 애쓰면 마음을 앓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남앞에 나서지 않고 항상 남의 뒤를 따른다.
ㅡ우후... 자기에게 집착? 놀랍다. ...척이나 체는 자기집착이었다. 타인에게만 집착을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154.
제 혼자만이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듯이 세상을 가르치려 들지 말자! *다른 생명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하고 다른 생명체들을 섬기며 세상과 원융무애 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 있으랴!*
ㅡ원융무애...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 서로 융화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을 나타낸 말.
함께 모두가 잘지냈으면 ... 희망사항!
세상속에서 도는 하나로 통한다. 길은 달라도 하나인 것. <마음의 도덕경>을 읽고 ‘도’에서 다시 나를 보고 묵상하게 된 ‘겸손’ 이다.
책을 왜, 읽는가? 라고 물을 때에 책을 통해서 깨달음한 뒤에 실천하고 몸에 습관화가 되어져 내 것이 된다면...책읽은 목적의 완수랄까?
-묵상-
내가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진 건? 겸손해져 갔나? 내면을 보다가 ‘내가 부끄럽다.’는 것, 알아차리게 됬다.
마음을 보다가 불쑥불쑥 나오는 ..척이 보였다. 비춰지는 포장지에 싸여진 가시달린 선인장처럼, 그 ..척들은 교만이라는 가시가 꼼꼼히 박혀 있었다. ..척이 나오는 순간 상대방은 가시에 찔리는 것이다. 그 상처에 피가 나는 아우성. 아프다고 소리도 낸다. 어쩌면 더 몸에 맞는 옷처럼 나에겐 편안한 일상이 됬는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 비교와 경쟁이 있었고, 열등감과 우월함이 있었고, 상처에 대한 복수가 있었고, ..척하는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고,....교만 덩어리인 나를 알아보기 였다.
내가 겸손하다.는 착각은 왜? 어떻게? 하게 된걸까?
이대로 나로는 부족했을까? 만족이 안된 걸까?
30대 중반 신앙묵상을 시작한 후, 내가 나를 가장 먼저 본 것이 ’교만‘ 이었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무척 생소 했었다.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는 겸손.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겸손해진다. 고 하던데...
나는 교만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본 교만은 세상을 다 가진듯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바벨탑과 같이 높이 있었고, 누구탓 하기 전에 내려와야 살 것만 같았다. 그 높은 곳, 교만은 무척 외로운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교만을 지키기 위해선 탐욕이 생겨나고 탐욕은 알게 모르게 질투와 분노마저 품게 된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니까.) 내 안의 나는 도도하게 보이기도 하고 건방진 모습에 안하무인. 참을 수 없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아! 그래야 살수 있다는 착각속에 칼날을 세우고 살았구나.’ 는 것.
10대에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니, 아버지의 교육안에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 겸손은 아니었다. 아주 사랑하는 딸을 서울이라는 곳에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처음 알려주셨는데, 그 세상은 무섭고, 아주 조심해야 하는 두려운 곳이라고... 아버지는 도도하게 살아내는 법으로 교육하셨다. 누구에게 민폐를 끼쳐도 안되지만 누구와도 쉽게 마음을 주지도 말것. 나를 지키는 건 이제 나밖에 없다.라면서. 앞만보고 걸으라셨고 그렇게 걸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선 알든 모르든 교만으로 들어왔다.
교만의 위력은 나를 지켜내는데 충분했고 넘쳤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먼저 다투거나 화내지 않았지만 마음은 차갑고 냉정했다. 내가 살고 이기는 방법으로 터득해 갔다. 강인한 악마와 타협해서 세상적으로는 잘 살아냈다.
가톨릭 안에서 세상적인 교만을 벗어내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온 영적교만의 모습. 다시, 나는 묵상을 시작하면서 60대에 들어와서야 ‘겸손한 그 높은 곳은 외로움이 아닌 고독이니 행복하다.’ 라고 알아졌으니...하느님이 계신 곳, 도가 완성된 자리였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이지만 그곳을 향해 가야만 살아낼 것 같기에 책을 읽으며 도를 알아가며 실천하는 내가 되고자 부족하지만 묵상하면서 살아간다.
오늘도 이만큼이나 아는 척을 하였으니, 어디까지??? 난 겸손이 무척 어렵다.
한편 자존심이 교만안에서 자란다. 자존심이 점차 자존감으로 변화가 일어나 내 안에서 자라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겠지... 도를 향해 묵묵히 걷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