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겨울 다네이책읽기) 카를 융-기억.꿈.사상.12
창조주가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 로 신께 나가는 방법
395.
나는 부처와 신들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심 깊은 아시아인들에게 타타가타(부처)가 그야말로 가장 높은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이유로 사람들은 소승불교가 무신론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여러 신의 힘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ㅡ‘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아테네 언덕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언덕 마준편에우뚝 서있는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었고, 수많은 신상들을 만들어서 신을 믿던 때였다. 신전 한쪽면에 써 있던 이 글귀를 시작으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해서 아야기 해 나가고 있었다. 세상이 지금보다도 더 미성숙 할때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서 인간은 두려움(자연이나 노병사..)을 극복해 나갔다. 그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한계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느님을 알아듣고, 느끼고 체험한다는 것은 어쩌면 각자에게 주어진 때가 다르고, 길도 다 다를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신에 대해서 긍정하며 삶을 겸손되이 사랑하면서 가는 것이 결국엔 하느님께 도달할 수있는 길이겠구나! 우린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나와 하느님과 연결 된 빛의 통로만이 구원이다.


402.
1923년 첫번째 둥근 집이 세워졌다....그곳은 나에게 모성적인 장소 같은 의미가 있었다.
403.
1935년...네 개의 서로 다른 건물부분이 그것도 12년의 세월이 지나 이루어졌다.
1955년 아내가 죽은 후에 나는 나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내적 의무를 느꼈다. 볼링겐 집으로 말하면, 나는 양쪽 탑 사이에 아주 낮게 기어 들어가 있는 가운데 건물 부분이 이를테면 나 자신이나 나의 자아를 표시 한다는 것을 문득 발견했다. 그때 나는 한층을 더 추가해서 그 부분을 높였다 이전 같았으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을 단지 주제넘는 자기과장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노년에 이루게 된 자아 또는 의식의 확장을 나타낸다.
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미리 예감했던 것에 실현, 즉 개성화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져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나중에 비로서 나는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형태. 즉 정신적 전체성의 상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오래전에 뿌린 씨가 싹을 트는 것처럼 그 일이 전개 되었다. 볼링겐에서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본체로 존재한다. 여기서 이를테면 ‘어머니의 태초의 아들’ 이다. 연금술에서 매우 현명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노인이니’ ‘태고니’ 하는 것은 내가 어릴적에 이미 경험한 것으로, 그것은 이전부터 늘 살아 있었고 또 살아갈 제2의 인격이었다.
ㅡ제2의 인격인 내면의 ‘자기’ 를 통하여 나온 자기실현, 나만의 개성화가 즉 나였다.(자아에서 더 깊은 내면으로 ‘자기’ 로 들어가 나온 나는 달라진다. 자기화 된 나, 개성화가 된 나만의 나 이다) 융은 보여지는 자기만의 집을 지어가면서 자기를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았다. 인간이 무의식(열등감,부족함...같은 내 모습)을 통해 자기를 들여다 봄(묵상,명상,관상..)으로서 새롭게 변화가 일어나는 창조된 나만의 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내면에 잠자는 잠재력을 일깨워서 적극적으로 ‘자기화’ 를 위해 수행을 하고 말고는 내 자아가 할 일이다. 살아가면서 위기가 곧 기회가 되는 경우일 수 있다. 고통이 주는 신비 랄까?
오랜 시간 앎에 대해 목말라 하며 끊임없이 알고자 하던 나에게 어쩌면 신의 한수였을까? 신경증의 시간과 융의 만남은 보다 더 내가 추구하던 내면보기, 자기화의 깊이로 더욱 들어가 체계적으로 나를 정리하게 되니, 마음이 안정된 시기가 됬다. 이것저것 앎에 주워 담기에만 급급했던 내면속을 정리정돈한 것 같아서 말끔해져 갔다.

406.
여기 돌이 있네. 보잘 것 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의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408.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ㅡ돌에 새긴 문귀다. 자기.
‘철학자의 돌, 현자의 돌, 또는 마법사의 돌은 전설 속에 존재하는 물질로,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또, 때로는 사람을 젊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생명의 묘약). 오랫동안 서양의 연금술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었다. 연금술은 단순한 금속 변환만이 아니라, 신체와 정신의 정화, 그리고 우주적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철학자의 돌은 인간이 신성한 진리에 도달하고 우주의 비밀을 깨닫게 해준다고 믿었다.’(백과)
연금술의 완성을 꿈꾸듯이 인간도 자신이 하찮음의 돌에서 금이 되는 내면성장(자기화)의 완성을 위해서 각자가 수련, 고행, 명상,묵상과 관상등의 방식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