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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겨울 다네이책읽기) 카를 융-기억.꿈.사상.11

angella의 노래 2025. 1. 11. 10:26

융과 아버지와의 관계

26.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81.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로,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내며 깊은 신앙심을 내세워 그 의지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기적을 아버지는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성서의 계명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성서에 쓰여 있고 조상들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느님,  성서 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느님,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 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들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있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86.
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의심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은총에 관해 설교 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체험을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 방도를 알지 못했다.... 그후 18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는 은총에 대해 뭔가 알게 하여 양심에 갈등 속에 있는 그를 돕고자 하는 은밀한 희망을 항상 품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 한다면 모든 것은 최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우리의 토론은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끝나 버렸다. 그 토론들은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 추켜 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ㅡ융은 아버지와 심오한 대화에 늘 목말라 했다. 융의 아버지는 목사면서도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돌아가셨다. 융은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늘 실망하곤 했었다. 목회자면서 체험도 없었고, 융이 궁금해하는 것을 제대로 말해 준적이 없었다. 그것에 아버지 자신도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만 화를 내거나 우울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으니까. 아버지는 깨달음의 체험이 없는 상태로 믿음만을 주장하시다가 돌아 가셨고, 융은 꿈으로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

390.
꿈속에서 내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방문 했다....그러나 아버지는 생시와는 정반대로 훌륭한 재야 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버지가 스스로 무엇을 설명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서가에서 큼직한 성서를 꺼내 왔다....그는 구약 부분을 펼쳤다. 내 짐작으로는 모세 오경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떤 구절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 해석을 너무도 빠르게 현학적으로 했으므로 나는 따르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아버지가 다방면의 방대한 지식을 드러내며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너무나 지적이고 유식한 논증이어서 우리의 둔한 머리가 따라갈 수 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주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 아버지는 거기에 매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이 열렬하게 말했고 심오한 생각들이 흘러 넘쳤던 것이다. 나는 짜증을 내면서 아버지가 우리 같은 세 바보 앞에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
ㅡ융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다 못 깨우친 하느님의 신비를 이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으면 얼마나 깨닫겠는가! 다 못깨달아도 여기서 방향을 어느 곳을 향해 있다가 죽는냐? 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미쳤다. 하느님을 향해 있다면 죽음은 하느님의 세상(차원)으로 들어가니, 보는 순간에 다 알아지게 된다. 차원이 다른 곳, 볼 수 있는 영원이 마음의 차원으로 알아지는 곳이다. 꿈에서 융의 아버지는 이미 다 알아진 상태이니, 오히려 궁금해 하는 아들 융에게 이젠 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꿈에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의 살아가는 삶의 방향에 더 확고함이 생겨진 귀절이었다. 아무리 묵상을 한다해도 인간은 누구도 완성엔 도달할 수 없다는 것. 다른 차원을 알기엔 환상이나 꿈처럼 한계가 있을 뿐이다. 융도 야곱의 베텔에서의 꿈도 모두가 신비의 문으로 다른 차원을 엿보기 정도의 수준이라는 거.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린 내적인 자기로 들어가려고 하고, 연금술에 도취하고, 우주에 매달리고 , 하느님을 알려고 할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찾기 같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라는. 완전함엔 이를수 없지만 . 죽으면 알게 되겠지만. 우린 알아가려는 의지로 삶의 기쁨과 성장으로 나가는 것. 고행의 길이면서도 희열이 있는 깨달음의 길이다. 깨달음은 각자의 몫이고, 다 때가 있으니,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안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전혀 신앙생활도 교회도 성경한 줄도 읽지 못하셨지만 그건 아버지 삶에 기회나 때가 아니었다는 거. 다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양심대로 살다가 가셨다. 평생을 봉사단체에서 좋은 일을 하시고 내가 보기에도 양보가 미덕이셨던 분이셨다. 다만, 아들과 풀지못한 고통만을 가지고 떠나셨다. 이젠 차원이 다른 저 세상에서 다 아셨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낸 삶의 방식에서 무엇이 옳고 그름이었다는 것, 그마저도 족쇄가 풀리듯이.. 연기처럼 풀어 헤쳐지면서 평안해지셨을 내 아버지. 책을 읽어 가면서 깊이 위로가 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