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24년4월 다네이 책읽기)교부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한교연
하느님의 기쁨
106쪽
“사는 것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느님만 계시면 충분하고 죽음역시 아름답지 않겠나!” 짧지만 심오한 이 단상의 출전은 비잔틴의 위대한 신학자요 수도승이었던 고백자 막시무스의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107쪽
막시무스는 성경과 전통에 따라 피조물의 존재는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으로 생겼다고 본다....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표지가 된다는 말이다.
ㅡ인간의 사랑으로 만 우리는 세상에 나올수 없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예스가 될 때 한 인간의 탄생과정이 이루어진다.
절대적 충만이신 하느님께서도 이 충만함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으셨다고 생각해 볼수 있으리라....하느님께서 본성상 사랑이시라면 마땅히 그러하시지 않겠는가?
ㅡ좋은 것, 맛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겠나,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의 완성일진대 어떻겠나, 다 주고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108쪽
더 구체적으로 막시무스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당신 피조물이 당신과 ‘닮은 상태’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다.
ㅡ자식의 모습에서 나를 닮은 부분이 있을 때 오는 행복이 있다. 하느님은 당신을 닮음으로 사람의 모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보시니 참 좋았다.’ 라시며 만족해 하셨다.
....사람이 거룩하게 변모하여 신성의 영역으로까지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로 ‘하느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ㅡ가톨릭 신학뿐만 아니라 타종교나 심리학에서 단어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 ㅡ부처ㅡ자기화 라는 단어들 이다. 조금씩 변형은 있지만 근본적인 하느님과 하나되는 일치에선 결국, 묵상(렉시오디비나)든 참선 명상이든 심리적인 훈련을 통해서 무의식속의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 그 내면에 들어가는 방법 이론에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자의를 비움으로 오는 이타적인 사랑, 자비, 연민의 마음으로 완성을 이룬 상태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인간은 그 누구도 욕망을 다 비울수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하느님화 ‘ 로 되어질 순 없다. 다만 그 방향으로 가는 여정을 ‘도’ 닦는다 라고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때 비로서 자기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기에 바로 이때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 기쁨은 세상의 다른 기쁨과 달리 끝이 없다.
ㅡ무한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해도 인간의 수명의 한계와 깨달음의 단계가 있고, 사랑이라는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끝이 없다. 다만 어느정도의 단계에 들어가면 알아지는 참사랑의 맛이 달다는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그 방향으로 가려하는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도우심(은총)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조차도 인간의 삶속에서 오는 변화들에 의해서 수없이 넘어지고 되돌아가기도 하고 다른 길도 가보고 한다. 그렇더라도 달콤한 참사랑의 맛을 알았다면 인간은 회개하고 돌아온다.
이 기쁨을 일러 막시무스는 ‘피조물이 무한하신 분에게서
무한히 길어 마신다.’ 라고 표현한다....막시무스는 하느님
‘당신도 피조물의 즐거움으로 즐거워 하시기 위해 ’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노래한다.
ㅡ아주 맛있고 좋은 샘물이 있을 때 무한히 물이 나온다.
아무리 퍼내도 얼마간의 샘물은 늘 똑같이 채워져 있다. 그때의 기쁨과 만족처럼....서로에게서 조건없는 사랑나눔 만큼 기쁜 것이 없다. 즐겁게 줄 수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 마음나눔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다.
109쪽
아, 이런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이에게, 사는 일는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죽는 일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아름답지 않겠는가.....그렇다면 어떤 성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는 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느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지 않겠는가.
ㅡ여기서 걸린다.부족한 신앙심에. 아멘.